제목 일어나 빛을 발하라(3) No 3413
글쓴이 양인국(yiksh) 조회수 74
[ 날짜 :   2022-01-16 오전 8:13:34 ]
2022. 1. 16. 사60:1-3.

일어나 빛을 발하라(3)

1. 우리가 있는 곳에서 비춰야 할 빛들 가운데 하나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소망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랑이다. 지난 주 우리는 믿음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들었고 오늘 우리는 소망에 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특별히 오늘은 성경을 통하여 소망의 중요성과 우리가 있는 곳에서 소망의 빛을 비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원한다.

2.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볼 때 죄로 인하여 넘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들 가운데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들 가운데 하나는 소망이다. 즉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하여 상실한 에덴을 회복하기 원하는 꿈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의미다. 물론 여기 에덴을 회복하기 원하는 꿈이란 지금보다 더 복된 삶을 살고자 하는 꿈을 말하는데 이것을 일반적인 언어로 말하면 희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신앙의 언어로 표현하면 “구원에 대한 소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내재해 있는 희망이야말로 실낙원(失樂園)으로 인하여 갖게 된 절망과 좌절 가운데 단절될 수밖에 없었던 인류의 역사를 오늘까지 지속할 수 있게 해 준 힘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을 반어적으로 말한다면 “희망이 없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삶에서도 희망을 상실하면 더 이상 삶을 지탱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스스로 삶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망은 삶을 이어가도록 이끌어 주고 세워 주는 힘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한 삶을 이어갈 수 있고 세워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믿음의 사람들의 예들 가운데서 특별히 욥의 예는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당시 욥이 직면하고 있던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그는 동방의 의인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으며 살아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이 닥쳐왔다. 그는 한 순간에 모든 소유와 자녀들을 잃어버렸고, 자신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숨을 쉬는 순간조차도 쉼을 얻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욥에게 더 큰 고통은 사람들의 비웃음과 정죄함이었다. 그의 아내는 욥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온 삶을 비웃으며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했고, 욥의 친구들은 그의 곁에서 날마다 그를 정죄했다. 이와 같이 불행한 현실에 직면한 욥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었겠는가? 만일 우리가 욥이 직면했던 것과 같은 현실에서 살고 있었다면 살기보다는 죽기를 바랐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이와 같은 불행한 현실을 극복해 나갔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욥에게 이와 같은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고난 가운데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스스로를 세워갈 수 있었다.

우리는 동일한 사실을 바울의 삶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고린도후서1장 8-10의 말씀이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이 말씀이 말해 주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삶의 여정에서 살 소망조차 가질 수 없는 극히 어려운 환경에 직면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환경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을 보다 더 온전하게 세워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직면한 환경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있는 한 어떤 환경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자녀들이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굳건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그들 가운데 소망을 심어주고자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무지하여 우리의 자녀들을 세속의 길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운 환경으로 인하여 좌절할 수밖에 없을 때마다 우리 안에 소망을 불러일으켜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음의 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을 주셨고. 애굽에서 사백 년 동안 살고 있던 이스라엘에게는 출애굽에 대한 소망을 주심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를 범함으로 인하여 넘어질 수밖에 없는 때마다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 주심으로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심으로 다시 일어나게 해 주셨다. 특별히 구약을 관통하고 있는 메시야에 대한 약속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선민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살도록 이끌어 준 힘의 원천이었다.
우리는 동일한 사실을 신약에서도 찾을 수 있다. 구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약 시대 교회와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 중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주신 소망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은 신약 시대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소망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소망의 빛을 받은 사람들일뿐만 아니라 이 빛을 세상에 비추며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알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소망의 빛을 비춰주시기를 바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를 통하여 이 빛이 세상에 비추이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있는 곳에서 소망의 빛을 비추며 살 수 있는가? 살아가며 깨달은 것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들 가운데는 약한 것이 있고 강한 것이 있다는 것이고, 또한 선택할 기회가 있을 때에도 거기에는 좋은 방향으로 선택할 요소가 있고 나쁜 방향으로 선택할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이웃을 대할 때 그의 약한 것보다는 강한 것을 보고 칭찬해주고, 비난하기보다는 격려해 주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행위 자체가 이웃들에게 소망의 빛이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는 듣는 사람에게 자신에 대하여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다윗은 형제들로부터 무시당하였고 부모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했지만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듣고 그의 삶의 여정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물론 다윗은 이와 같은 예언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외적으로는 변함없이 목동으로 살고 있었지만 내적으로는 자신이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꿈을 꾸게 되었다. 물론 후에 그의 꿈은 실현되었고 이로 인하여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만일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을 듣지 못했다면 그가 왕이 될 수 있었을까? 이처럼 우리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이웃들은 꿈을 갖기도 하고 가지고 있던 꿈을 상실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들의 강점을 말해 주고 비난의 말보다는 격려의 말을 해 주는 것이 그들에게 소망의 빛을 비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은혜의 어떠함을 전함으로 있는 곳에서 소망의 빛을 비출 수 있다. 지난 주 주일 말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은혜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 사람보다 더 복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 안에서는 소망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복음서에는 절망 가운데 살고 있던 사람들이 주님을 만난 후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온 한 여인은 그 동안 많은 의사들을 만나며 병을 고치고자 했지만 고침을 받지 못했다. 그의 고통에 대하여 복음서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5:26)” 이 여인은 병을 고치기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오히려 치유의 가능성은 점점 사라져가고 병은 더욱 중하여져 갔다. 이 여인에게 희망이 있겠는가?

복음서이 기록된 이야기들 가운데 다른 하나를 더 든다면 삼십팔 년 동안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던 사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삼십팔 년 동안 질병으로 고통 받으며 살아오면서 고침 받고자 노력해 왔지만 어떤 효험도 얻을 수 없었다. 이처럼 그는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더 이상 치유의 희망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전설에 의지하여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며 살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 희망이 있었을까?(요5:1-9)

복음서이 기록된 이야기들 가운데 또 다른 예를 든다면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맹인으로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맹인으로 살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 고침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요9장)

여기 언급한 세 사람의 예를 생각해 보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들은 서로 다른 것이었지만 인간적인 시각(視覺)으로 볼 때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난제(難題)를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들 모두는 주님을 만남으로 인하여 자신들에게 절망과 좌절을 안겨 주었던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 받고 있던 여인도, 삼십팔 년 동안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던 사람도 그리고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도 모두 치유함을 받았다. 이들의 예는 은혜 안에서는 어떤 사람도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있는 곳에서 소망의 빛을 비춘다는 것은 우리가 이웃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전해 주고 또한 그 은혜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다르게 표현한다면 이웃으로 하여금 은혜에서 자신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가 이웃을 볼 때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그리고 은혜 안에서 보게 해 주심으로 언제나 그들에게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우리가 있는 곳에서 소망의 빛을 비추는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