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요한계시록13장 No 3095
글쓴이 양인국(yiksh) 조회수 270
[ 날짜 :   2019-01-19 오후 9:20:03 ]
요한계시록13장

용은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었다(12:17). 이것은 그가 여자의 남은 자손와 싸우고자 선전포고 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3장은 바다와 땅에서 올라온 두 짐승이 용의 악한 계획에 따라 성도들과 싸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3:1,2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요한은 환상 가운데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짐승이 나온 바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른 하나는 짐승은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또 다른 하나는 짐승과 용은 어떤 관계인지이다.
이 환상의 원천은 다니엘서 일 것이다(단7:2-8). 본문이 다니엘서의 환상과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해석하는데 여러 면에서 빛을 비춰주고 있다. 다니엘은 큰 바다에서 큰 짐승 넷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단7:2,3). 마찬가지로 요한도 바다로부터 한 짐승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다니엘이 본 네 짐승과 요한이 본 짐승은 모두 악의 세력이다. 그렇다면 여기 말하고 있는 “바다”란 자연의 바다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악의 원천”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악의 원천을 무엇으로 표현하든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악의 원천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과 또한 모든 악의 세력은 바로 이곳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처럼 바다를 악의 원천으로 해석할 때 바다로부터 나온 용과 짐승은 악의 위계질서를 상징할 것이다(13:2,4). 천사의 세계에 위계질서가 있듯이 악령의 세계에도 위계질서가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다른 하나는 이 짐승의 모습에 대한 해석이다. 여기에는 너무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모든 해석은 다음의 두 가지 범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는 요한이 환상 중에 본 짐승을 다니엘이 이상 중에 본 짐승과 동일시함으로 그것을 “로마와 황제들”을 연관시켜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짐승을 악의 실재로서 그리고 짐승의 모습을 악이 가지고 있는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다음은 전자의 예로서 바클레의 해석이다. “요한의 표현은 과거의 네 짐승의 모든 요소를 한 짐승에다 합해 버렸다는 것이 눈에 띈다. 요한의 짐승은 표범 같고 곰의 발과 사자의 입을 가진 짐승이다. 그것은 요한에게 있어서 로마 제국은 아주 악마적이요 무시무시한 존재여서 그 한 제국에 과거에 있었던 악한 제국들의 모든 악한 공포를 다 내포하고 있었다. 로마는 모든 악의 집대성이었다. 이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있다. 이 머리와 뿔들은 로마의 지배 계급과 황제들을 상징했다. 로마의 처음 황제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까지 일곱 황제(디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디우스, 네로, 베스파시안, 티투스, 도미티안)가 있었다. 이 일곱 황제가 그 짐승의 일곱 머리들이다. 그러나 그 밖에 이 짐승은 열 뿔이 있었다고 했다. 이 둘째 모습의 설명은 이렇다. 네로의 사망 후 잠시 동안 거의 완전한 혼란의 시대가 있었다. 18개월 동안 세 사람이 왕권을 잡았다. 그들은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였다. 그들 세 명의 통치 기간은 합쳐서 2년도 못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의 일곱 머리의 명단에 들지 못했다. 그러나 잠시 동안이라도 왕권을 잡았었기 때문에 열 뿔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머리에 참람한 이름들이 있었다는 것을 황제 숭배로 해석했다(바클레이, 요한계시록 주석).
후자의 예로서 존슨(AlanF. Johnson)의 해석이다. “머리나 뿔들을 각각 상이한 왕들이나 나라들과 동일시하는 시도는 삼가야한다. 머리가 일곱 있는 괴물의 형상은 고대 수메르. 바벨론 및 이집트의 문서들 속에 충분히 그 증거가 나와 있다. 텔 아스마(Tel Asma: 지금의 바그다드 동북 약 80㎞의 고대 Eshnunna)에서 출토된 B.C. 2500년경에 만들어진 원통형 인장에 머리가 일곱이고 그 등에 불길이 일고 있는 괴물을 죽이는 두 신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그 머리들 중의 넷은 마치 이미 죽은 듯이 축 처져 있다. 네 번째 머리를 치고 있는 형상의 손에 창이 있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은 구약의 리워야단과 연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시편 74:14에 보면 ”악어(리워야단)의 머리를 파쇄하시고“라고 이 괴물의 머리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다니엘서나 또는 다른 곳에서 사용된 형상과는 관계없이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각기 분리해서 다른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구약 본문에 인용된 리워야단과 라합 그리고 용이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던 애굽과 앗수르 등의 열강을 의미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약의 기자들의 생각에 열방들은 머리가 일곱 달린 괴물(리워야단, 라합 및 용)로 표현되는 사단의 원형적인 실재와 우상숭배 제도를 불가분리하게 동일시하였다. 그래서 짐승은 정치적 권력이 아니라 정치적 실재 속에 나타나 있는 악의 제도를 의미했다. 이점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짐승 자체는 어떤 역사적인 형태의 표현과 그 묘사를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이며, 또한 어떤 제도적 양상과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짐승은 지금 소돔이나 애굽, 로마 또는 예루살렘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요일2:·18). 요한의 생각에 가장 무서운 적은 가증한 현혹이며 따라서 그의 표현은 정치적인 것보다는 신학적인 함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짐승이 역사 속에서 어떤 사람 안에 정치 종교 또는 경제 제도 안에, 또는 이런 것들을 모두 조화한 마지막 전체주의적 문화 속에 최후의 결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가능성을 재제할 수 없는 것이다. 요지는 짐승이 과거나 미래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것이다(엑스포지스터 연구 주석. 존슨, 요한계시록주석). 이처럼 두 짐승과 형상에 대한 두 해석에서 전자의 해석은 ”로마와 황제들“로 해석하고 그 나라와 황제들이 보여준 악을 통하여 악의 세력을 상징한 것으로 보았고 후자의 해석은 짐승과 그 형상을 어떤 특정적인 시대에 적용시킬 수 없고 모든 시대에 나타나는 악의 실재와 세력을 상징하고 있다고 했다. 결국 두 해석의 차이란 짐승이 가지고 있는 형상의 모형을 어디에서 찾느냐는 문제만 다를 뿐 악의 세력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에는 동일하다.
13:3-6. “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5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짐승의 머리 하나가 상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짐승의 머리가 이처럼 상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짐승과 싸워 그 머리를 상하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외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짐승의 머리가 상한 것을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관련시켜 해석하고 있다. 창세기에 예언 된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3:15)”라는 말씀에서 여자의 후손은 바로 메시야로 오실 주님을 의미하는데,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바로 그 행위가 예언에 이른 것처럼 “짐승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짐승은 사지(死地)에서 다시 살아났다. 이것은 주님께서 대속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어둠의 권세들을 넘어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때까지 그들이 세상에서 역사(役事)할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즉 패잔병의 마지막 발악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짐승에 대하여 마치 죽었다 살아났다는 것에 미혹 되어 짐승을 따랐다.
용이 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었을 때 사람들은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13:4)”라고 하며 짐승과 그에게 권세를 준, 용을 경배했는데 이것은 짐승의 미혹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우상 숭배에 얼마나 깊이 빠지게 될 것인지 말해 준다. 짐승은 정해진 기간(마흔 두 달) 동안 “과장되고 신성모독을 말”을 하였다. 6절은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해 주고 있다.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비방하다(βλασφμεω)”란 문자적으로 욕설이나 조롱의 말 또는 신성모독을 의미하는데,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에 대한 범과”를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직접적인 모독을 의미하고 또한 그의 이름나 말씀에 대한 모독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모독을 말했다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인 것처럼 사람들을 유혹하여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짐승은 이처럼 기적을 통하여 또는 과장 된 말을 통하여 자신을 하나님처럼 위장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미혹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사탄이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미혹”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우리가 사탄의 미혹의 덫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특별히 짐승의 말을 “과정된 말”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가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하여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말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처럼 짐승이 허세를 부렸을지라도 그의 말은 하나님 앞에서 다만 “시성모독”일 뿐이다. 여기 “신성모독”은 헬라어로 “훼방”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13:7-10.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짐승은 사람들을 미혹했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과 싸웠다. 이것은 어둠의 권세들이 언제나 하는 두 가지 일이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여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고(고후4:4), 다른 한편으로는 성도들을 위협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신앙에서 떠나게 한다. 본문은 짐승이 성도들을 위협하는 것을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13:7)”라고 말하고 있다. 짐승의 권세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용으로부터 온 권세다. 짐승은 용으로부터 권세를 받아가지고 성도들과 싸워 이겼다. 여기 “싸웠다”는 표현은 “미혹”보다는 “대적”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짐승이 “성도들과 싸워 이겼다”는 것은 순교를 의미한다. 성도들이 짐승으로부터 오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것을 “싸우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러므로 짐승이 성도들과 싸워 이겼다는 것은 성도들의 순교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짐승은 자신이 성도들과 싸워 이길수록 자신의 멸망이 가까이 이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실제로 하나님은 성도들의 순교를 허용하심으로 심판을 앞당기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순교한 성도들의 탄원의 기도를 통하여 심판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았다(5:8,6:10,8:3). 이것은 짐승이 순교자를 많이 낼수록 그 자신의 생명이 단축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처럼 짐승의 박해로 인하여 성도들이 순교하는 동안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짐승의 지배아래 굴복할 것이다.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13:7,8)”
요한은 이 환상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처럼 권고하고 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13:9,10)”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는 의미로서 믿지 않는 자들과 믿는 자들 모두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이다. 만일 짐승과 그 악의 세력에 동조하여 성도들을 박해하면 그들은 그것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거나 해함으로 자신이 영광을 받고 유익을 얻는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 스스로가 행한 행악대로 그들 자신에게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이들의 박해 가운데서도 인내하고 믿음을 지킨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합당한 영광을 주실 것이다. 따라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오히려 이로 인하여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마5:10).
13:11-14. “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 12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요한은 환상 중에 땅에서 올라 온 두 번째 짐승을 보았는데 이 짐승은 새끼 양처럼 두 뿔이 있었고 용처럼 말하고 있었다. 이 짐승도 처음 짐승이 했던 모든 권세를 행할 수 있었다. 이 짐승은 이렇게 함으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그들로 하여금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때 상처 입어 죽게 되었던 처음 짐승이 살아났다. 뿐만 아니라 이 짐승은 큰 이적을 행하여 땅에 있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처음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게 했다.
두 번째 짐승이 땅에서 올라왔다고 했는데, 여기 땅은 처음 짐승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된 수식어 일뿐이다. 즉 처음 짐승이 올라 온 바다가 “악의 원천”이라면 여기 땅도 바다와 동일한 “악의 원천”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다. 짐승의 모양을 묘사한 표현들은 두 번째 짐승의 성격을 말해 준다. 처음 짐승이 사람들을 미혹하였던 것보다 두 번째 짐승은 더욱 더 사람들을 미혹한다. 특별히 두 번째 짐승은 이적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므로 처음 짐승보다 더욱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 두 번째 짐승의 모습이 두 개의 뿔을 가진 어린 양으로 묘사된 것도 이런 성격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짐승은 이리와 같이 악할지라도 어린양의 가죽을 씀으로 인하여 더욱 사람을 미혹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짐승과 첫 번째 짐승의 관계를 살펴보면 악령의 세계에서 두 번째 짐승은 첫 번째 짐승보다 낮은 위치의 악령일 것이다. 왜냐하면 두 번째 짐승이 하는 중요한 일들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처음 짐승이 사람들을 미혹하여 용을 경배하도록 만든 것과도 같다. 따라서 악령의 세계에 존재하는 위계질서에 따르면 용은 최고의 위치에 있는 존재이고 그 다음이 첫 번째 짐승이고 그 다음은 두 번째 짐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3장을 볼 때 이 셋은 악의 삼위일체로서 마치 성 삼위 일체 하나님을 모방한 듯하고 또한 그들이 각각 하는 일도 위계질서에 따라 서로 구분 되어 있는 듯하다. 용은 주로 하나님과 천사를 대적하고 첫 번째 짐승은 세상의 배후에서 모든 악을 조장하고 있고, 두 번째 짐승은 성도들과 직접 싸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세상은 첫 번째 짐승과 두 번째 짐승으로 인하여 미혹을 받아 하나님을 떠나고 있다. 특별히 첫 번째 짐승이 정치, 문화, 경제 등 여러 가지 제도들과 권력이나 문화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악의 세력이라면 두 번째 짐승은 표적과 기사 등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종교적 성격을 띤 악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모든 시대 악의 세력들은 언제나 이 두 가지 수단을 통하여 세상을 지배하고 미혹해 왔다.
13:15-18. “15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두 번째 짐승의 미혹으로 사람들이 첫 번째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을 때 두 번째 짐승은 또 다시 용으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두 가지 일을 하였다. 하나는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였고, 다른 하나는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를 죽이는 일이었다. 두 번째 짐승이 우상에게 생기를 주었다는 것은 어떤 속임수나 또는 어떤 종교적인 효과를 통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신비감이나 또는 종교심을 불러일으키는 행위였을 것이다. 악의 세력들이 사람들을 미혹하는 방식이라면 또 다른 방식은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이다. 두 번째 짐승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자들을 모두 죽이는 일을 했다. 본문은 그의 교묘하고 잔인한 일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13:16,17)” 짐승은 사람들의 이마에 자신을 따르는 자들과 반대하는 자들을 구별할 수 있는 표를 주었다. 이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수였다. 그리고 사회로 하여금 짐승의 표를 가진 자만이 매매할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은 매매를 할 수 없으므로 생활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여기 짐승의 표란 육백육십육을 말한다.
육백육십육에 대해서는 수많은 추측과 해석들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수가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실제적인 표시를 의미하지 않고 상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요한이 계시록에서 사용하고 있는 숫자들이 모두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근거한다(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이십사 장로, 십사만 사천의 인 맞은 자, 새 예루살렘 성곽의 백사십사 규빗 등). 육백육십육이 상징하는 것은 육은 칠과 대조되는 수로서 “불완전성”을 상징할 것이다. 즉 7의 완전에 대한 마귀적인 모방, 거의 완전한 현혹성 등을 의미한다. 많은 보수적인 학자들도 육백육십육을 암호로 보지 않고 부정(不淨)한 악의 삼위일체 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불완전한 모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엑스포지스터 성경연구 주석, 존슨, 요한계시록 주석 참고). 그러므로 짐승의 표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자를 하나님의 인 맞은 자(7:2-4)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짐승의 표를 받았다는 것은 짐승에게 속한 자를 의미한다.
짐승은 이 표를 가진 자들에게만 매매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여기 짐승의 표는 물리적인 표시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악의 세력이 사회 구조 자체를 자신들을 숭배하도록 유리하게 만듦으로 이로 인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에게 불이익을 가도록 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실제로 오늘의 사회 구조 가운데서도 신앙의 양심에 따라 사는 자들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불이익을 주는 것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신앙의 양심에 따라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오히려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그리스도인이 주일을 성실히 지키려할 때 이로 인하여 공동체로부터 외면당하는 것 등은 모두 세속화됨을 거부함으로 인하여 받는 불이익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과 “짐승의 표”는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과 어둠의 세력에 속한 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속성을 의미한다고 항 수 있다.